부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기술’이다
대학교 1학년 첫 수업 시간, 여고를 나온 나는 교실을 둘러보며 생각했어. “와, 남자 애라들이 정말 많네.” 어색하게 앉은 그 자리는 내 자리 같지가 않았어. 당연하지, 내가 원해서 선택한 학교도, 학과도, 과목도 아니었으니까. 전공필수라는 이유만으로 그 강의실에 앉아 있었거든.
고3처럼 그냥 해야 하니까, 정해진 대로 학교를 다니기엔 이제 주민등록증이 나온 어엿한 성인이잖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어른으로서 내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는, 그 묘한 선들이 전부 충돌했어. 근데 정작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
OT 때 만난 눈이 깊고 눈썹이 유독 짙은 남자애가 눈에 띄었어. 중학교 때 다녔던 같은 학원 친구더라. 나는 사실 그보다 그 친구랑 더 친했는데, 어쩌다 보니 둘이 사귀게 됐지.
학기 초에 한 남자 선배가 유독 술을 엄청나게 먹인 날이 있었어. CC라는 이유로, 완전히 인사불성이 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라는 거야. 멘탈 완전히 놔버린 성인 남자를 내가 무슨 수로 옮겨? 근데 또 K-장녀의 책임감인지 뭔지, 얘를 어떻게든 택시에 태웠지.
택시 태우자마자 얼마 안 가 나한테 토를 하더라, 내가 가장 아끼던 스트라이프 니트에. 거금 58,000원 주고 산, 주말 내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산 내 옷에.
핸들을 훽 돌려서 길가에 정차한 택시 기사님께 90도로 머리 숙여 사죄했어. 근처 편의점에 뛰어가서 청소 도구랑 물 사 왔지. 변상하라고 큰소리 치시는 기사님께 말했어. “죄송하지만 제가 지갑에 5,000원밖에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분께 5,000원 드렸는데, 당연히 화가 안 풀리시지.
당장 토한 사람 내리라고 해서 혼자 끌고 내렸어. 아까보다 더 인사불성이 된 남자친구 어르고 달래서 핸드폰 꺼내 ‘엄마’ 번호로 전화 걸었지. 한 시간쯤? 실랑이하다가 어머니가 차로 데리러 오셨는데, 어찌나 차갑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나를 지긋이 보시고는 “너도 타”라고 하시더라. 집에 도착해서 아들 내려주고, 다시 나와서 “너는 집이 어디니? 시간이 늦었는데 태워준다”고 하시는 거야.
“아닙니다, 택시 타면 됩니다” 했지만, 생각해보니 아까 지갑에 있는 돈 다 택시 기사님 드려서 돈도 없고, 스무 살 여자애가 그 늦은 시간에 택시 탈 깡도 없잖아. 그땐 카카오 택시도 없었어. “감사합니다” 하고 쫄아서 차를 얻어탔지.
집으로 가는 내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너, 남자친구 만난다고? 공부를 먼저 해야지. 그렇게 놀고 다니고 그러면 못 써, 얘. 둘이 공부하려고만 만나야지 놀려고 만나지 말아라. 애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
고개를 푹 숙였어. 그랬더니 보이는 토에 젖은 내 니트. 시급 3천 원대를 차곡차곡 모아 산 내 니트.
그날 밤 집에 도착해서 엄마 몰래 니트 빨면서 생각했어. 이 패배감은 뭐지? 내가 원하지 않던 학교, 학과에 와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끌려다니고, 내 잘못도 아닌데 사죄하고 있는 오늘 밤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어른이 됐는데, 어른들에게 휘둘리는 이 상황은 뭘까?
모두가 “스무 살? 좋을 때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매일이 불안했어. 타인에게 나를 맞추느라 정작 내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지.

그 관계는 오래 못 갔어.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가 아니었지. 좋아하는 감정 하나로 만났을 뿐, 어떤 공통분모도 없었거든. 게다가 ‘우리 아들’ 하는 극성 어머니의 아들을 만난 나는 아들 꼬셔서 공부 못 하게 만드는 ‘여자애’로 찍혔어. 웃긴 건 남자친구는 야간대학 전형이었고 나는 주간대학이었다는 거.
근데 그 관계 끝내는 데 꽤 걸렸어. 왜냐면 나는 그때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거든. ‘거절’이라는 걸 무서워했거든. 혼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어. 철학과 가고 싶었는데 취업은 어떻게 할려고 저러나 하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 경영학과 선택했듯이, 관계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원하는 걸 우선했고. K-장녀로 자라며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평생 열심히 살았던 딸이니까.
변화의 계기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됐어. “나는 이 관계에서 행복한가?” 답은 명확했지. 아니었어. 그럼 왜 계속하고 있는가? “헤어지면 외로울 것 같아서.” 그 대답 듣는 순간 깨달았어. 나는 관계 자체가 아니라 고립감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야.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는 대학 안 가고 취업했어. 공통 분모가 사라지니까 각자 살아내기 바빠서 전처럼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점점 고립됐지. 대학에서 교우관계도 좋지 못했어. 그 남자친구 옆에 있는 여자애로 주목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화장 하면 화장 했다, 안 하면 안 했네, 머리 묶으면 묶었네, 풀면 풀렀네” 말이 많았거든. 나중엔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어. 오만가지 뒷얘기가 나왔는데 그땐 내가 그 감정의 지옥을 핸들링 못 했지.
난 그 고립감을 연인 관계로 해소하려 했던 거야.
헤어지고 나서 처음 경험한 건 자유가 아니라 더 큰 고립감이었어. 그 고립감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체 휴강을 하고(사실 문 밖에 나서기가 무서워서 수업을 못 갔어) 나 자신과 마주했거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 시간에, 비로소 내가 뭘 원하는지 물어볼 수 있었어.
선택의 주도권 되찾는 과정은 사실 순탄치가 않았어. 작은 것들부터 조금씩 시작했지. 만나고 싶지 않은 약속 거절하는 것.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 남들 시선이 두렵더라도 내가 원하는 선택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많은 관계가 정리됐어. 근데 남은 관계들은 오히려 훨씬 건강했지. 왜냐면 그건 의존이 아닌 선택으로 만들어진 관계였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 그때의 나는 선택할 수 없었거든.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거절할 수 있는 자유. 그게 억만금보다 값진 거야.
맨얼굴로 세상과 마주하는 법
“화장 하면 했다, 안 하면 안 했네.”
그 말들이 쌓여서 대인기피증이 됐어.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두려웠지. 어떻게 꾸미든 평가받을 거고,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는 뭐라고 할 테니까. 그래서 화장이 두꺼워졌어. 화장 뒤에 숨어 보려고 애썼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최소한 나쁜 말은 듣기가 싫었던 거야.
근데 화장으로 해결해 보려고 보니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더 공허해지더라. 거울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이게 진짜 내 얼굴인가?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데”
지옥 같은 하루가 계속되는 게 싫었어. 한 번은 엄마 주도하에 다 큰 남동생이 억지로 끌고 나간 거야. 엄마가 남대문시장에서 기다린다고. 불안에 떨고 있으니까 그때 버스에서 내내 손을 잡아주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 수많은 어른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깨달았어. 누군가에게 기대는 걸로는 영영 문제가 해결 안 된다는 것. 결국 나를 돌볼 수 있는 어른은 나뿐이라는 것.
맨얼굴로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어. 말 그대로의 맨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지 않고 내 안의 기준으로 나를 돌보는 방식이었지.
가장 먼저 시작한 게 혼자 밥 먹는 데 성공하기였어. 지금은 혼밥, 혼술이란 단어가 있지만, 10년 전엔 아니었거든.
그다음은 아침 루틴이었어. 일어나서 물 한 잔 마시기. 창문 열고 환기하기. 침대 정리하기. 거창한 거 아니야. 근데 이 작은 루틴들이 쌓이면서 달라지는 게 있더라고. 내 하루를 내가 만들며 시작한다는 느낌.
그다음은 버리는 연습이었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억지로 유지하던 관계들이 정리됐어. 만날 때마다 뒤에서 나를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지 않기 시작했지.
그리고 채우는 연습을 시작했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로. 조용히 심리학, 철학책 읽기, 혼자 밥 먹고, 혼자 카페 가기, 글쓰기. 누가 뭐라든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들.
화장 안 하는 날도 늘어났어. 처음엔 불안했지. 근데 시간 지나면서 깨달았어.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화장 해도 뭐라고 했다는 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내가 버린 것들은 타인의 잣대, 불필요한 관계, 어떻게든 더 좋게 보이려는 강박이었어. 그리고 새로 채운 것들은 나만의 루틴, 진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지.
맨얼굴로 세상과 마주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근데 그 용기를 낸 순간부터 삶은 진짜 내 것이 되기 시작했어.
먼저 가서 기다릴게, 천천히 따라와
너도 지금 원하지 않은 선택지들을 앞에 두고 막막해하고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
나는 너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봤어.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느라 정작 내 얼굴을 잃어버렸던 시간들. 선택의 주도권 없이 끌려다니며 불안했던 날들. 관계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순간들.
그 모든 걸 지나 지금 여기에 서 있어.
이 블로그 ‘먼저 가서 기다릴게(Wait for You)’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어. 나는 이미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고, 이제 출구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거든. “여기야, 이쪽으로 오면 돼. 이 터널도 끝나더라”라고 말해주고 싶어.
앞으로 이 공간에서 나는 삶의 튜토리얼을 나눌 거야.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법, 심리적 경계선을 세우는 법, 삶의 질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 돈과 자산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들. 거창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매일을 살아가는 진짜 실질적인 방법들 말이야.
20대 혹은 사회초년생인 아직 병아리 같은 너가 지금 나와 같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심리적으로 지쳐 있다면, 삶의 질을 높이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면, 이곳이 너를 위한 공간이 되길 바라.
억만금을 줘도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단단해진 내가 너에게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이거야.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충분히 가치 있고, 네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야.
그 모든 게 쌓여 너만의 단단함을 만들어낼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따라와.
언니의 멘탈 케어 레터를 매주 받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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